[일소소병] 뱀
2022년 03월
*현패AU라서 말투 변형이 조금 있어요. 어색해도 너그러이 이해 부탁드려요.
벌써 봄인가.
환기라는 명목하에 열어둔 창문을 타고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불어온 바람은 살랑살랑 손을 간질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창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뺨에 닿는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거리를 오가며 거세가 와 부딪히는 매서운 바람에 몸을 웅크렸던 것 같은데.
하던 걸 멈추고 몸을 일으켜 창틀에 가까이 다가갔다. 바람이 반겨주듯 온몸을 감싸왔다.
“에취.”
바람이 목도 간지럽히는 탓에 어김없이 기침이 튀어나왔지만 그럼에도 창문을 닫지 않고 밖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에는 태양이 높게 떠 있었고, 그 주위에는 구름이 한 점씩 모여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풍경일까.
귀갓길에 한숨 돌리고 보는 풍경 속에서는 달과 별만이 하늘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야 운치 있다고 생각했지, 그게 며칠 반복이 되자 얼마나 싫어지던지. 일이 없어 한가할 때는 알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탓에 어두 깜깜한 밤하늘만 보게 되자 지금 이 모습이 소중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못 본 밝은 하늘을 실컷 구경한 후에 이번에는 고개를 숙여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바쁜 이곳과는 다르게 그들은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뭐 실제로도 그들과 여기는 매우 다른 축에 속하긴 했다. 한때 저곳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톡. 토독. 톡. 검지로 창틀을 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어릴 때부터 곁을 지켜온 우락부락한 남자들을 평범하다고 여기며, 그런 남자들이 모여있는 집에서 그 남자들에게 아침부터 인사를 받고,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다른 집도 다들 이럴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신분을 철저히 숨기며 외부에 노출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가족과의 나들이?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지.
사실 아는 게 없으니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는 것이 없고,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모르던 걸 알게 된 이후부터는 이런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은, 일반인들은 구태여 자기를 숨길 필요가 없고, 어디 돌아다니기도 편하며, 집에서까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잠깐 일탈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다시 꺼낼 생각이 없는 기억들이 대부분이지만.
짧은 생각을 마치고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러던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이 중요했다. 부정까지는 아니어도 귀찮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지금은 미우나 고우나 내 가족들이니 그들을 먹여 살리려면 일을 해야 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까울 참이었으니.
‘그래도 조만간 마무리가 되려…….’
다시 돌아가 일을 하려 시선을 옮기던 차에 한 곳에 시선이 박혔다.
하하.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하긴 했나 보네. 이제 헛것도 다 보이고.
마치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에 열중해서 흐릿한 게 분명한 눈을 한번 비비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라진 게 없는 풍경에 서서히 입가가 굳어갔다. 심지어 저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절 향해 웃어 보이는 듯했다.
“저 새끼가 왜 또…….”
그래도 생각 좀 환기했다고 나아진 것 같던 두통이 다시 일었다.
*
“그래도 오랜만인데 표정을 좀 풀어보는 게 어떠니?”
불쾌하도록 익숙한 말투가 고막을 찔렀다.
“지랄은. 그런 말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닐 텐데?”
날카로운 말로 맞받아쳤으나 뭐가 그리 웃긴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심지어 웃겨서 웃는다기보단 저 속에는 비웃음이 가득할 게, 어떤 꼴일지 궁금해서 찾아온 게 분명해서 속이 뒤틀렸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지 그래?”
“이런, 이런. 오늘도 너무 날 서 있는 거 아닌가?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옛정은 얼어 죽을. 우리한테 그런 게 어딨었다고.”
그딴 말이나 하러 왔으면 당장 꺼져.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 험했으나 상대는 여전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표정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 왕님께서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음미하듯 불쾌해하는 반응을 살펴보던 이는 생각보다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했던 거에 비해 순순히 일어나는 모습은 오히려 경계를 한층 더 심하게 하게 만들었다. 저 문밖을 나서는 순간, 아니, 이 건물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였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니 숨넘어갈 정도로 느릿한 걸음은 한층 더 화를 돋우기 충분했다. 다리도 긴 놈이 저렇게 조금씩밖에 못 걸어? 보폭은 왜 그렇게 좁아? 뭐라 말은 못 하고 노려만 보고 있자 보폭이 더 좁아진 듯했다. 망할 새끼.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웃음소리가 뒤따라 울렸다. 그럼 또 보자고.
쾅, 문이 닫히고 아까의 웃음소리는 신기루였던 것처럼 빠르게 조용해졌다.
확실히 인정하긴 싫어도 존재감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었다. 저 자식은, 장일소라는 인간은.
좋을 거 없이 엮여놓고서 뭐가 그리 좋다고 매번 찾아오는지. 애초에 좋아서 오는 것도 아니었을 거다. 신경 긁으러 온 놈한테 반응을 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늘 입이 먼저였다. 입이 먼저 거친 말을, 저놈이 기다렸을 법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옛정? 웃기는 말이지. 어릴 때는 그 정이라는 게 조금은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벌써 10년도 더 된 지금은 옛정은 무슨 빌어먹을.
심지어 그 옛정이라는 것도 연인으로서의 정이었다. 남들이라면 헤어지자마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는 그 한때 연인이었던 관계. 임소병은 당연하게도 그 정이라는 건 헤어지자마자 모조리 갖다 버렸다. 심지어 헤어진 것도 쌍방합의 후에 헤어진 거나 다름없어서 더더욱 어려울 것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걸 감추고 오직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사랑은 결국 속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임소병에게는 물려받은 녹림이, 장일소에게는 직접 일으켜 세운 만인방이 있었다. 이 점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첫 번째로 둘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를 회상한다면, 그때의 기억을, 그때의 감정을 되살려본다면 임소병은 장일소를 사랑했었다. 그 깊이와 상관없이 장일소를 사랑했었던 건 맞았다. 임소병이 처음으로 간섭 없이 스스로 선택했던 이였으니까.
서로가 첫 번째가 될 수 없었던 부분이 아니라면 임소병은 제 나름대로 열심히 연인으로서 행해왔다고 생각한다. 장일소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임소병은 그때 행위들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장일소도 마찬가지였다. 연인으로서 부족한 부분은 없었다. 사소한 의견 차이는 있어도 잠깐뿐이었다. 장일소도 임소병도 굳이 끝까지 제 생각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 가벼운 마음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본다. 굳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 없는 관계였기 때문에, 끝이 있는 관계였기 때문에 오히려 친절했고, 상대를 배려했었던 것 같았다.
아는 것 없이 만나, 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지내왔던 우리는 한계에 다다르자 당연하게도 이별을 고했고, 상대 역시 거기에 의문을 품지도 않고 자연스레 헤어졌다.
아는 것 없이 만나, 알아간 것도 없었으니 헤어지면 그걸로 모든 게 끝일 줄 알았으나 장일소와 임소병은 결국 다시 만나게 되었다. 사업 파트너로서.
임소병은 장일소를 다시 만나게 된 날 알게 되었다. 절 넘어서 보던 게 무엇이었는지. 아마 장일소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이었다. 우습게도 헤어진 후에야 말이다.
다시 만났을 때 임소병은 장일소를 모른 척하려고 했었다. 어차피 찰나의 시간을 얕게 공유했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친근하게 굴었다. 그 친근함 속에 엿 같은 속셈이 들어있을 테지만, 일단 겉으로는 아무 속셈도 없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이를 대하는 것처럼 굴었다.
임소병은 그게 항상 불쾌했고 마주하기 싫었다. 하지만 장일소는 잊을만하면 주기적으로 뻔뻔스레 그 낯짝을 비춰주러 왔다, 바로 오늘처럼.
전애인일 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장일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알고 있는 지금은 전과 같은 생각이 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다시 떠오르는 얼굴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일단 이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그 자식한테 이런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낭비라 여겨지니 그의 의도대로 그가 돌아간 후에도 남아 그를 생각하고 있는 것보단 할 일을 마저 하는 게 훨씬 나았다.
*
하루빨리 장일소가 내게 관심을 끊게 해달라는 기도의 정성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내가 깡패 새끼라고 신이 내가 하는 기도에는 관심도 없는 걸까.
“또 보자고 했잖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왜 이 자식이 벌써 내 눈앞에 있는 거지? 마지막으로 찾아온 게 며칠 전이었다. 즉, 아직 찾아올 시기가 아니었다.
오늘은 정말 일 때문에 왔을 수도 있지. 정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장일소는 이미 제 안방처럼 편히 앉아있었다. 그 꼴을 불만스럽게 보며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또 왜 왔는지나 빨리 말하고 썩 꺼져.”
어차피 찾아온 장일소를 쫓아내는 것을 불가능하니 차라리 빨리 들어주고 쫓아내는 편이 조금 더 낫다는 판단하에서 나온 말이었다. 얼마 전까지 골치 썩이던 일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힘겹게 얻어낸 여유를 장일소와 함께 보내고 싶진 않았다.
“성질도 급해라.”
“알면 빨리 말해.”
“전에 같이 갔던 레스토랑 기억하니? 거기를 예약해뒀단다. 같이 가지 않겠니?”
“내가 왜. 네 그 충실한 부하들이랑 같이 가든가. 왜 바쁜 사람을 붙잡고 지랄이람.”
하하하. 즐겁다는 듯이 내뱉는 웃음소리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미간을 찌푸리며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야 알 수 있을까? 왕께서는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다 헛소문이었나 보네.”
장일소는 한껏 웃은 뒤 립스틱을 발랐을 게 분명할 정도로 선명하고 붉은 입술을 뗐다. 난 소병이 너와 데이트를 하고 싶은 거란다. 불그스름한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이제 이해됐니? 그럼 이번 주말에 거기서 보자꾸나.”
“…….”
“왜?”
지금 왜? 왜? 하.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한다고 장일소가 들어 처먹을지도 모르겠어서 튀어나올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말이.
“미쳤냐?”
“그럴 리가.”
저 웃는 낯을 한 대 때려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말이 안 통하면 팬다는 게 제가 살아온 세계의 상식이지만 장일소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비통했다. 그동안 몸이 평균보다도 허약했던 사실도 이렇게 원통할 수 없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리 이미 다 끝났어. 그것도 10년 전에. 아직도 불장난이 하고 싶은 거면 다른 놈을 찾아.”
“후후. 그럴 리가. 내가 아직도 그런 거 하나 구분 못 하겠니.”
그런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나오렴.
장일소는 그 말을 끝으로 일이 있다며 나가버렸다. 혼자 와서 떠들고, 혼자 약속을 잡고 그렇게. 그러는 내내 임소병은 별말도 못 했다. 그가 여전히 마음에 있어서? 좋아서? 그럴 리가. 맹세코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할 말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장일소 앞이어도 할 말은 따박따박 했던 임소병이 이번에는 장일소한테 제대로 한방 먹었다.
“데이트?”
허…….
얼핏 알 것 같다고 생각했던 장일소의 속셈에 대해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열어둔 창문을 넘어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을 따라 창 너머를 바라보자 어느새 장일소는 건물을 벗어나고 있었다. 볼 줄 알았다는 듯이 뒤돌아본 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봄은 봄이라고 뱀이 깨어난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