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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4월
*캠퍼스AU 현대물이라 말투 변형이 조금 있습니다.
“윤종 선배!”
멀리서부터 한눈에 보일 정도로 방방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온몸으로 재촉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힘껏 흔들던 손을 내리고 이번에는 후다닥 윤종을 향해 달려갔다. 널찍한 보폭으로 인해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빠르게 달려온 후배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오늘도 활기차구나.
조곤히 말을 건넨 윤종이 옅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를 놓치지 않고 알아차린 조걸도 그 미소에 답하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수업 다 끝나셨어요?”
“그래. 걸이 너는?”
“저도요! 선배, 그러면 저희 같이 공부해요!”
“오늘도 자려고?”
“아, 선배!”
오늘은 몇 분 걸릴 것 같아?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조걸이 금세 입술을 불퉁히 내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늘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 그럼 난 30분쯤으로. 전혀 안 듣고 있죠? 평소처럼 투닥거리며 도서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도서관만 가면 안 오던 잠도 온단 말이에요. 하지만 오늘은 저번에 놀아서 못 한 만큼 할 겁니다!
조걸의 말에 웃던 윤종이 갑자기 그를 붙잡아 세웠다.
“걸아, 잠깐만.”
“네?”
“오늘 도서관은…….”
아까까지 옅게나마 미소 짓고 있던 낯이 순식간에 놀라고 당황하고 있다는 걸 넘어서 곤란하다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응? 그 모습에 되려 조걸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윤종이 다른 사람도 아닌 조걸 앞에서 난처해하며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었다. 윤종이 남들 앞에서 친절하고 사람 좋은 것처럼 보이긴 해도, 좋으면 좋다, 상황이 안 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그이긴 한데, 유독 조걸에게 답해줄 때는 더욱 단호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가끔은 고민을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을 정도로 빠르게 거절을 할 때가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조걸을 놀리기 위해 하는 것이었기에 서운했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서운했냐며 미안하다고 머리에 손을 얹어주기도 했었다.
거기에 고민을 했나 싶을 정도로 빠른 거절을 받을 때가 아니더라도 조걸의 긍정적인 사고회로로 인해 저 좋을 대로 ‘그게 다 내가 편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윤종이 조걸에게 유독 단호하다는 점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의미로 윤종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이런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새로우면서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한편으로 걱정도 들었다. 아니면.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은데.”
“네? 왜요? 저 혹시 뭐 잘못했어요? 요즘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음. 그게…….”
윤종이 쉽사리 답을 못하고 그 텀이 조금 길어지자 아까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눈빛이 조금 빛을 잃었다.
“선배, 무슨 일이라도.”
“그건 아니야.”
이제는 익숙해진 윤종의 단호히 부정하는 목소리에 조금 안심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라니까. 그렇다면 왜 이러시지? 당황스러움이 가시고 이젠 의문이 퐁퐁 솟아났다. 그럼 오늘따라 왜 이러시는 거지?
“그럼 오늘은 안 되는 거예요?”
“……아니다. 아니야. 가자.”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멈춰있던 윤종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조걸은 윤종의 손을 텁 잡고 도서관 쪽으로 이끌었다. 얼른 가요.
그 순간 윤종이 조걸의 손을 맞잡으며 멈춰 세웠다.
“잠깐, 걸아.”
*
“웬일이래요.”
“…….”
쪼옥.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 빨아 마신 조걸이 윤종을 빤히 쳐다보았다. 윤종은 아까부터 눈앞의 전공책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늘 만나서부터 윤종만 쳐다보던 조걸은 알 수 있었다. 윤종이 처음 책을 펼쳤던 페이지 그대로였다.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마 읽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까부터 꾸준히 말을 걸어보았으나 윤종은 시원찮은 반응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것에 굴할 리 없는 조걸은 꿋꿋하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이상해요. 사실 어디 아팠다거나?”
불쑥 손을 뻗어 윤종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닿기도 전에 쳐내질 손을 예상했으나, 조걸의 손은 그 예상을 깨고 이마에 순조롭게 닿았다. 응? 오늘따라 당황하게 만드네. 속으로 삼킨 조걸은 뻗었던 손을 걷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선배, 당장 저랑 병원 가요.”
“뭐?”
“오늘 막말도 안 하고, 손도 안 쳐내고, 어디 아픈 거죠? 그럼 말을 하지는 왜 안 하고 참아서, 읍?”
윤종의 손바닥이 어느새 조걸의 입을 막고 있었다.
이 녀석아, 진정 좀 해라!
입이 틀어막힌 채 윤종의 눈짓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작스러운 큰 목소리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둘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받은 관심에 머쓱해져 도로 주저앉았다. 잠시 아무 말도 없자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숨이 막혔다. 조금씩 떠드는 목소리가 커지자 여즉 조걸의 입가에 머물고 있던 윤종의 손도 떨어져 나갔다.
“죄송해요…….”
“됐다. 신경 쓰지 말고.”
네……. 잘 들리지도 않는 작은 목소리를 끝으로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서 빨대만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얼마나 씹었을까, 빨대가 너덜너덜해질 때 즈음 윤종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게 뭐 그렇게 이상할 일이었냐?”
“선배 이런 거 안 좋아하잖아요.”
전부터 매번 카페 가서도 하자고 했었는데 항상 안 된다고 거절했으면서. 갈 거면 너 혼자 가라면서. 그런데 오늘은 먼저 가자고 하고.
조걸은 마지막 말에 은근히 힘을 주어 말했다.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윤종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거 몇 번이나 된다고. 심지어 ‘갈 거면 너 혼자 가.’라는 말은 딱 한 번 처음 카페 이야기를 꺼냈을 때 했었고, 그 후 말이 심했다며 사과까지 했었는데.
“그래서 싫으냐? 다음부터는 무조건 도서관 가주리?”
“그건 절대 아니죠! 아.”
목소리가 커지려는 것을, 이번에는 조걸이 먼저 자각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에도 하는 말은 여느 때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이것도 당연히 좋아요. 근데 도서관도 선배랑 같이 가는 거니까 좋아요.”
그래서 매번 따라갔던 거예요.
실실 웃는 낯에 윤종은 더위를 느꼈다. 더위가 가게끔 그런 녀석이 잠을 잤었냐 같은 말이라도 던져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윤종은 그 말을 더위와 함께 애써 삼켰다.
“공부해라.”
“넵.”
*
달그락. 컵 속에서 얼음이 녹아 미끄러졌다. 그 사소한 소리에 집중이 깨진 윤종이 내내 책을 보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숙이고 있었던 탓에 뻐근해진 목과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어느덧 족히 세 시간은 지나있었다. 오늘은 가볍게만 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는데. 오늘따라 어쩐지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작게 한숨 쉰 윤종은 조용한 제 앞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조걸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차라리 잘 거면 편하게 자도 되는데. 아까 처음 졸고 있는 조걸을 보고 자도 된다고 했을 때, 윤종의 목소리에 놀라 눈 뜬 조걸이 안 잘 거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마셨다. 그 탓에 조금은 잠이 깬 줄 알았는데 그걸로는 부족했었던 듯싶다.
‘슬슬 일어나야 할 텐데.’
벌써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게 내버려 둬도 새벽에 잠 못 자고 뒤척거릴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그를 단번에 깨웠겠지만, 오늘은 조금 고민이 되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걸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해주려고 했었다.
그래서 조걸이 꼬집은 대로 조금은 어색한 기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내내 생각하고 계획했던 것도 아닌 아까 전 조걸의 말에 문득 떠올라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다름 아닌 생일 때문이었다. 얼마 전 걸이의 생일이 있었다. 생일을 챙겨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별로 없었다. 차라리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윤종은 제 생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또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당연하게도 그동안 만난 지인들과도 서로 챙기지 않게 되었다. 생일을 당일에 알게 되면 축하한다는 말 정도만 건네주었었다. 조걸 역시 생일 당일 제 생일을 알려왔으나.
“하…….”
그때를 생각하면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조걸이 말한 그날이, 조걸의 생일이 하필 4월 1일이었다. 흔히 만우절이라고 불리는 날. 그래서 윤종은 조걸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었다. 넌 그런 장난을 치냐며 웃고 넘겼었다. 그리고 다음날 조걸의 생일이 정말 4월 1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것도 잘 들어가지 않았던 SNS에 오랜만에 딱 한 번 들어갔다가.
뒤늦게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알아버렸으니 미안한 마음에 생일을 조금이나마 늦게라도 챙겨줘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처음인데 생일을 챙겨준 기억 역시 희미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며 미적거리던 것이 벌써 오늘까지 미뤄졌었다.
그래서 아까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것이 평소 하고 싶다고 했던 것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카페에서도 공부하자고 했기에 도서관에 가려던 것을 막고 카페에 온 것이었다. 사실 오늘은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조걸이 먼저 공부 이야기를 꺼냈기에 이쪽을 선택했다. 저렇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게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음료가 조금 남아있는 제 몫의 잔을 들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굴러다녔다. 작은 소음에 꾸벅꾸벅 졸던 조걸의 눈꺼풀이 조금 들렸다.
“걸아. 이제 일어나야지.”
“으으…….”
“오늘은 공부한다더니?”
“했어요…….”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해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
결국 졸음 때문에 미적거리며 한참을 시간을 끌다가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어느덧 밤공기는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둘을 메우고 있을 때 윤종이 먼저 운을 뗐다.
“걸아, 미안하구나.”
“네?”
한순간 잠이 다 사라졌는지 졸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윤종은 시선을 마주하며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생일말이다.”
“생일이요?”
“생일을 늦게 알아버려서 미안한 마음에 선물이라도 사줄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게 없어서…….”
“설마 그래서 오늘 카페에서 한 거예요? 제가 하고 싶다고 그랬어서?”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늘어뜨리는 목소리에 오늘 하루 종일 기행을 보였던 윤종의 행동이 한순간 전부 이해가 되었다.
평소처럼 도서관을 가려다가, 윤종이 제 생일을 장난인 줄 알고 넘겼다가 뒤늦게 알게 된 생일이 떠올랐고, 그래서 뭐라도 해주려고 전에 하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서 왔다는 거지.
윤종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때부터 실실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이젠 억누르고 있기 어려웠다.
“그럼 이게 선물이었던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음……, 혹시 따로 갖고 싶은 건.”
“응? 없는데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정말 없다는 듯이 가볍게 말하는 조걸에 윤종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흩어지는 윤종의 목소리에는 미련도 잠깐 맴돌다 같이 흩어졌다.
진짜 괜찮은데.
필요한 건 그때그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물욕에 대한 건 없었다. 아무거나 대도 윤종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건 제가 싫었다. 이왕 처음으로 윤종에게 받는 선물은 조금 더 의미 있는 걸로 받고 싶었다. 게다가 앞으로 또 그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제 생일이 4월 1일이라 잘 안 믿고 뒤늦게 축하해 주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윤종이 생일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 일은 잊고 살았는데, 윤종에게 축하 안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축하해 주는 윤종을 보니 이것도 나름.
“전 진짜 괜찮은데. 오늘도 선배랑 하고 싶은 거 해서 행복했어요.”
“…….”
“그래도 또 선배랑 같이 하고 싶은 거 생겼어요. 다음에는 진짜 데이트하러 가요. 오늘처럼 공부하는 거 말고요.”